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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이날 경연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나가고 신숙주(申叔舟)만 홀로 남아서 아뢰고 사관(史官)은 듣지 못했다. 대저 김이정은 신숙주에게 족친이 되어 지평•정랑의 자리에 이르렀는데, 이제 장차 장신(杖訊)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숙주가 김이정이 장죄(贓罪)에 처해질 것을 염려하여 이 밀계(密啓)가 있었다. 성상의 밝음이 아니었다면 능히 의심이 없었을 것인가?' 했다."

위의 내용은 「성종실록」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론(史論) 중에 하나입니다. 사론은 실록(實錄)을 편찬할 때 사초(史草)를 근거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첨부한 것으로 주로 군왕이나 대신들의 인물평이 많습니다.

당시 신숙주는 영의정이자 원상(院相)으로 어린 주상을 돕고 있었습니다. 원상이란 성종의 치정을 돕기 위해 원로 대신들로 구성된 당시의 한시적인 특수 제도랍니다~

그런데 신숙주의 족친인 형조정랑 김이정이 국가 소속 노비를 개인 사노비로 부려먹고, 가포(價布-부역(賦役)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그 대신(代身)으로 군포에 준하여 바치던 베)를 거두어 사사로이 썼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자, 그의 죄명이 장안(贓案-장죄(贓罪)를 범한 관리의 이름을 기록해놓은 장부)에 오르지 않도록 구명 운동을 벌인 것입니다.

요즘이야 어지간한 뇌물은 떡값으로 처리 해주고 있는 실정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장리(贓吏-뇌물죄를 지은 관리)명부인 장안에 올랐다 하면, 자손들까지도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등 가혹하게 다스리던 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아무튼 신숙주의 구명 운동이 통했는지 사간원과 사헌부가 매일같이 김이정을 장리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직간을 올렸지만, 그 때마다 성종은 재가를 하지 않고 그냥 고신(告身-벼슬아치의 임명 사령장, 직첩)만 빼앗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렇듯 신숙주와 같이 신하가 홀로 임금과 대면하는 행위를 '독대(獨對)'라 하는데, 독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윤대(輪對)'제도 때문입니다.

 


윤대 제도는 세종 7년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등이 진언하면서 시작되었는데 변계량이 진언한 내용을 잠시 살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 정부와 육조와 대간에 명하시어, 날마다 모든 일을 진언하게 하시어 정치하는 길에 자료가 되게 하시니, 총명을 넓히고 아랫사람의 심정을 통달하심이라 하겠사오나, 모두가 능히 종용(從容)하고 자세하고 정밀하게 여러 신하들의 심정을 다하지 못하옵고 또 나그네처럼 나아갔다가 또 나그네처럼 물러나며, 피리 부는 데의 수나 채우고, 생선의 눈알이 진주에 섞이듯이 하는 자도 혹 있습니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전성시대에는 모두 돌림차례로 임금께 대답(輪對)하는 법이 있었사오니, 이는 단지 총명을 넓혀서 막히고 가리는 폐단이 없게 할 뿐만 아니오라, 여러 신하의 현부(賢否)까지도 또한 임금의 밝게 비추어 보심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비옵건대, 옛 제도에 따라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날마다 차례를 돌려 대답하게 하시어 더욱 말할 길을 넓히시어, 아랫사람의 심정을 다 아룀으로써 신하의 사특하고 정직함을 살피시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

이러한 진언 내용에 세종은 즉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동반 4품 이상, 서반 2품 이상의 관직자에게 매일 들어오게 함으로써 윤대 제도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판돈녕 김구덕이 입대(入對)했을 때, 세종은 홀로 앉아 죄우 시신을 물리치고 독대를 즐겼고 사간원(司諫院-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했던 기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한 관청)에서는 독대를 할 때에도 사관은 반드시 입시시켜야 한다는 직언을 올렸지만 세종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조선왕조 시대에서 독대란 말이 처음 쓰여진 것은 바로 이 부분인데요~ 그 후 세종의 독대는 다소 주춤하다가 말기에 가면 독대하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했는데 대체로 원로대신들과 비밀리에 만나는 일이 많았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이나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불러 깊숙한 논의가 있을 때 독대를 자주 했다고 하네요~

그 후 세조 때의 윤대 제도는 독대를 막기 위해 두 사람씩 들어가도록 했고, 또 사관 입시를 허락하기도 했지만 윤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고, 옆에는 승지가 있고, 또 그 뒤에는 사관이 지켜보고 있으니 임금을 만나기 전에는 할 말이 태산 같았지만, 그 앞에만 가면 편히 이야기를 못하니 독대를 허락해 주든지, 아니면 서면으로 제출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신료들의 요구가 빗발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요구사항이 번번히 묵살되다가 예종 때 잠시 서면으로 제출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치국이념을 더욱 돈독히 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정책 노선은 사림(士林-조선 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가리키는 말)세력들과 연결되면서 더욱 활기를 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윤대에도 자연히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윤대의 사관 입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성종 5년에서 6년 사이에는 독대를 허락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목소리가 매우 높아 지는데 그때마다 성종은 '남이 보고 듣는 것을 두려워하여 할 말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라 하겠느냐'라면 반론을 합니다.

이 때 대신 정창손(鄭昌孫)도 독대를 지지하기 위해 거들고 나섰는데요~.
 
"신이 세종조의 윤대를 보건대, 매일 한 사람이 입대했으되, 승지와 사관이 모두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는 말하는 자가 사람이 들을까 두려워하여 뜻을 다하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하여서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는 독대하면 참언(讒言, 거짓을 꾸며서 남을 나쁘게 일러 바치는 말)이 혹 있다고 하나, 그러나 지금같이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는데, 어찌 참언이 있겠습니까? 비록 있다 하더라도 어찌 분변하기가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성종의 단호히 대답합니다.

"내 비록 참소(讒訴-간사한 말로 남을 헐뜯어 윗사람에게 일러 바침)하는 사람을 믿지 않더라도, 의심하는 생각을 품으면 이것이 어찌 옳겠는가?"
 
이를 통해 성종의 인군(仁君)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성리학적 대의명분의 정치가 정착해가는 단계임을 짐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서울시가 시장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회의나 면담 내용을 모두 기록하는 `사관(史官)제'를 도입했는데요~ 박원순 서울시장은 집무실에서 업무보고 등 회의와 공식ㆍ비공식 면담을 할 때 주무관을 배석시켜 모든 대화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옛말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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