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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시험(문과)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3년마다 치러지는 정기시험인 식년시, 비정기 시험인 증광시, 알성시, 별시까지 합치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 것 같지만 수만 명의 응시자 중 3년에 겨우 33인을 뽑았으니 그 치열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약용, 박제가 등등 이름난 학자들은 이 과거 시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정약용 자신도 과거합격을 위해 10년을 문장 다듬기에만 골몰했던 시절을 후회했고, 더구나 박제가와 같은 서얼은, '잠을 안자고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구나 공자라도 이 문을 나와야 할 것이다.'라는 말로 과거를 위한 과거 공부가 얼마나 비생산적인지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벌열(閥閱-국가에 공로가 많거나 관작 경력이 많은 가문) 자제들의 대리시험, 부정행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그들의 합격률 등 당시의 과거 합격이란 당대의 벌열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 극명한 예가 연암 박지원의 과거 시험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난은 했지만 조선 후기 명문가인 반남 박씨 막내 아들이었던 그가 평생 과거를 보지 않고, 처사로만 지내며 학문에 몰입했던 것에는 사연이 있었는데요~
 
다음 편지는 젊은 시절 과거에 응시했다 "짓밟혀 죽을 고생" 끝에 결국 낙방한 연암이 뒷집의 과거 시험 합격자에게 보낸 축하 편지입니다.
 
"무릇 요행을 말할 때 '만에 하나'라고들 합니다. 어제 과거 응시자가 수만 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데, 방에 이름이 오른 사람이(합격자) 겨우 20명에 지나지 않으니, '만에 하나'라고 말해도 되겠지요.

또 시험장 문에 들어가느라 서로들 밟고 넘어져 죽고 부상한 자가 무수했고, 형제들끼리 부르며 찾아다니다 혹시라도 만나면 손을 잡고서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만난 듯 여겼는데, 이 경우는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말해도 되겠지요.
 
지금 그대는 '열에 아홉'까지 갔던 저승 문턱에서 벗어났고, 게다가 '만에 하나'에 해당하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대에게 많은 사람들이 하듯 저는 '만에 하나'의 영광을 축하할 마음은 없지만,'열에 아홉'은 저승에 갈 위험한 시험장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도 된 것만은 축하드립니다.

마땅히 직접 찾아 뵙고 축하드려야 하겠지만 저 역시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뒤인지라, 지금 자리보전한 채 신음하고 있으니 조금 무심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난장판(難場-)은 이렇게 뒤엉킨 과거장 풍경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합격하고, 열에 아홉이 저승 문턱까지 가는" 난장판 과거시험 풍경 지금 각종 공무원 시험으로 늘 북적 이는 고시촌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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